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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vol.70
공공이 판을 깔면, 민간이 집을 짓는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 최현기(경북대학교 일반대학원 도시재생학과 연구원) 작성일 : 2026-03-24

본문


공공이 판을 깔면, 민간이 집을 짓는다


최현기 경북대학교 일반대학원 도시재생학과 연구원



  노후주거지정비 지원사업은 전면 철거가 어려운 저층주거지에 공공이 먼저 기반을 정비하고, 그 위에서 민간의 자율적 주택정비를 유도하겠다는 구상 위에 서 있다. 그러나 현장의 작동 방식은 정책의 도식만큼 단순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공공이 얼마나 많은 시설을 설치하느냐가 아니라, 그 기반 위에서 실제 정비가 가능하도록 누가 위험을 조정하고, 절차를 연결하며, 주민 사이의 합의를 돕느냐에 있다.



1. 노후주거지정비 지원사업, 무엇을 하려는가

  전면 재개발이 어려운 노후 저층주거지에 공공이 먼저 손을 내민다. 골목을 넓히고, 주차장을 만들고, 소공원과 생활편의시설을 넣는다. 그러면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낡은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짓고, 동네는 점진적으로 회복된다. 노후주거지정비 지원사업이 내세우는 기본 논리다.

  이 구상은 분명 매력적이다. 대규모 철거형 재개발이 사실상 어려운 지역에서 공공이 최소한의 기반을 보강하고, 주택의 정비와 공급은 민간의 자율적 선택에 맡기겠다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최근 정책은 일반정비형과 빈집정비형으로 구분하여 공공이 기반·편의시설 설치를 담당하고, 주택정비는 자율주택정비사업 등 소규모 정비수단을 통해 민간이 맡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노후저층주거지는 단순히 오래된 주택이 밀집한 공간이 아니다. 단독·다가구·다세대가 모여 있고, 주차장과 공원, 생활편의시설이 부족하며, 고령층과 저소득층 등 주거취약계층의 비중이 높은 경우가 많다.

  필지는 잘게 나뉘어 있고, 접도 불량이나 경사, 과소필지, 낮은 지가 같은 조건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결국 이 지역의 문제는 개별 건축물의 노후화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생활환경의 취약, 인구구조의 변화, 지역경제의 약화가 중첩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 점에서 노후주거지 정책은 집 몇 채를 새로 짓는 문제를 넘어선다. 어떤 지역은 기반시설 확충이 우선일 수 있고, 어떤 지역은 빈집 관리와 개보수 지원이 더 중요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지역은 공공참여형 정비가 더 현실적인 해법일 수도 있다.


판은 깔리고 있다. 문제는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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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의 논리, 그리고 현실

출처: 국토교통부, 「2026년도 노후주거지정비 지원사업 가이드라인」, 2026.2.6. 재구성



2. 새로운 사업이 아니라, 오래된 과제의 새로운 배열

  노후주거지정비 지원사업은 전혀 새로운 과제의 출현이라기보다,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노후주거지 문제를 다시 배열해 대응하려는 최근의 정책적 시도에 가깝다. 우리 도시의 저층주거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비의 대상이었다.

  과거에는 주거환경개선사업과 재개발이 그 역할을 맡았고, 이후에는 도시재생사업이 골목과 거점시설, 생활SOC의 정비를 담당했다. 한편 주택 부문에서는 「빈집 및 소규모주택 정비에 관한 특례법」을 바탕으로 자율주택정비사업·가로주택정비사업 등 소규모 정비수단이 마련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제도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한 채 개별적으로 작동해 왔다는 데 있다. 사업성 열악 지역에는 재생사업이, 사업성 양호 지역에는 재개발·재건축이 각각 작동했지만, 그 사이의 광범위한 노후저층주거지는 정책적으로 비어 있는 중간지대로 남아 있었다.

  공공이 골목을 정비해도 주택은 그대로였고, 반대로 주택정비 제도가 있어도 생활기반이 부족해 실제 정비가 일어나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 점에서 노후주거지정비 지원사업의 의미는 개별 사업의 추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재생과 정비, 관리와 공급, 공공과 민간 사이의 끊어진 연결고리를 다시 잇는 데 있다.


제도는 연결을 강조하지만, 설계는 특정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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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 주택정비사업 유형별 비교

출처: 국토교통부, 「2026년도 노후주거지정비 지원사업 가이드라인」, 2026.2.6. 재구성



3. 사례로 보다 — 작동하는 곳과 멈춰있는 곳

  정책의 가능성과 한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결국 사례다. 노후주거지정비 지원사업이 기대하는 민간 정비의 실질적 기반은 자율주택정비사업과 가로주택정비사업 같은 소규모 주택정비수단에 있다. 그러나 같은 제도라 하더라도 어디서는 작동하고, 어디서는 멈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성공 여부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업이 움직였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성공 사례 ① 대전 판암동 자율주택정비
  대전 판암동 자율주택정비사업은 소규모 주택정비가 어떤 조건에서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이 사업은 2개 필지, 2명의 소유자가 주민합의체를 구성해 추진한 매우 작은 규모의 정비였다.
  2018년 주민합의체가 구성된 이후 약 11개월 만에 지상 5층 규모의 다세대주택 10세대와 근린생활시설 2호가 준공되었다. 당시 전국에서 두 번째 자율주택정비사업 완료 사례였고, LH 매입형으로는 첫 사례였다.
  이 사례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지 빠른 준공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민간의 자율정비가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해졌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소규모 주택정비는 본질적으로 사업 규모가 작아 금융조달과 미분양 위험에 취약하다.
  판암동 사례에서는 이러한 초기 위험을 공공이 일정 부분 흡수했다. LH는 사전 매입확약을 통해 미분양 위험을 덜어주었고, HUG의 저리 융자는 자금조달 부담을 낮추는 역할을 했다. 주민의 자발적 합의가 중요했던 것은 맞지만, 그 자발성이 실질적 사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공공의 선제적 위험 분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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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판암동 사례 사진

출처: 국토교통부 보도자료(2019.6.13.), https://www.molit.go.kr/USR/NEWS/m_71/dtl.jsp?lcmspage=56&id=95082401



  성공 사례 ② 대구 동인시영 — 가로주택정비 (공공참여형)
  대구 동인시영아파트 사례는 판암동과는 다른 유형의 현실을 보여준다. 1969년 준공된 동인시영아파트는 오랜 기간 재건축 논의가 이어졌으나, 사업은 장기간 표류했다.
  전환점은 LH가 공동시행자로 참여하면서 공공참여형 가로주택정비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한 데 있었다. 이후 조합 설립과 해산, 재추진의 시간을 거쳐 지방권 최초의 공공참여형 가로주택정비사업 완료 사례로 이어졌다.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성공담에 있지 않다. 동인시영은 정책 기조와 현장의 해법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낸다. 비아파트 중심의 저층주거지 정비를 강조하는 정책과 달리, 실제 현장에서 선택된 해법은 결국 공동주택 방식의 정비였다.
  이는 정책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노후주거지의 유형과 조건이 결코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떤 곳에서는 다세대·다가구 중심의 소규모 정비가 현실적이지만, 어떤 곳에서는 오히려 공공참여형 공동주택 정비가 더 타당한 해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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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인 시영 사업 전/후 항공사진

출처: 대구 항공사진 통합플랫폼, 재구성


  사례가 말해주는 것

  판암동과 동인시영은 모두 성공 사례로 볼 수 있지만, 두 사례가 작동한 방식은 다르다. 판암동은 공공의 매입확약과 금융지원이 결합되며 소단위 정비가 가능해진 사례다. 반면 동인시영은 장기간 표류하던 정비사업에 공공이 공동시행자로 참여하면서 사업의 방향과 구조 자체를 바꾼 사례다.

  이 두 사례를 함께 보면, 노후주거지 정비의 핵심은 단일한 사업모델의 확산이 아니라 지역 조건에 맞는 수단의 선택과 조합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4. 현장을 가로막는 것은 사업성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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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의 논리, 그리고 현실

출처: 국토교통부, 「2026년도 노후주거지정비 지원사업 가이드라인」, 2026.2.6. 재구성


    노후저층주거지 정비의 현실을 이야기할 때 흔히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사업성이다. 실제로 지방 중소도시의 저층주거지는 낮은 지가·작은 필지·높은 공사비라는 구조적 조건 속에서 소규모 정비의 채산성이 매우 낮다.

  그러나 현실의 장벽은 사업성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실제 사업은 사업성 분석, 주민합의체 구성, 각종 신고와 인허가, 착수와 준공까지 긴 행정절차를 거친다. 이 과정에서 현황측량 이후 설계변경이 발생하기도 하고, 공부상 정보와 현황이 맞지 않아 사업이 지연되기도 한다.

  사도 문제나 상속 미정리, 지분 분산, 주소 정비 미흡 같은 문제는 서류상으로는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업 전체를 멈추게 만드는 병목이 되기도 한다. 노후저층주거지 정비는 건축의 문제가 아니라, 측량·지적·등기·도로권한이 얽힌 복합 행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주민 합의도 단순하지 않다. 단 한 명의 반대가 전체를 무너뜨린다. 소규모 사업일수록 오래된 이웃관계와 생활상의 이해관계가 얽혀, 갈등은 쉽게 감정적으로 전개된다. 융자 절차·용적률 인센티브를 주민이 스스로 파악하기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결국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지원제도 안내"를 넘어서는 조정 역량이다. 측량과 권리관계 정리, 인허가 절차 안내, 주민 간 합의 조정, 금융·사업관리 연계까지 담당할 수 있는 현장형 코디네이터가 없다면, 정책은 있어도 작동하지 않는다.



5. 이 방향만이 전부인가? 정책의 계보와 남겨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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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저층주거지 관련 정책의 연혁

출처: 직접 정리


  노후주거지정비 지원사업은 전혀 새로운 시도가 아니다. 1990년대의 주거환경개선사업은 전면 철거와 재개발로 접근했고 공동체는 해체됐다. 2000년대의 재정비촉진사업(뉴타운)은 더 광역적인 재개발을 시도했지만 장기 표류와 대규모 해제로 끝난 곳이 많았다. 2013년 이후 도시재생뉴딜은 거점시설과 골목 정비에 공을 들였지만 노후주택 정비 효과는 미흡했다. 그리고 2024년, 뉴:빌리지가 등장했다.

  공통점이 있다. 공공이 판을 깔아도 민간이 움직이지 않으면 동네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축공간연구원(2025)은 지방 중소도시 노후주거지에 대해 명확한 경고를 내놓는다. 영세 필지·낮은 지가·높은 건설비라는 구조적 조건 때문에 소규모 주택정비의 사업성이 처음부터 낮고, 노후주거지정비 지원사업이 공공주차장과 거점시설만 조성하는 데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auri brief 302호, 2025).

  기반시설 설치 비용을 국비로 충당하고 금융 인센티브를 제공할 때, 그 수혜는 결국 사유재산 가치 상승으로 귀결된다. 공공의 투자가 특정 소유자의 이익으로 집중되는 구조에 대한 논의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대구의 과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전국 단위 정책이 지방 중소도시의 특수 조건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인구가 줄고, 외곽에 새 아파트가 계속 들어서는 상황에서 도심 노후저층주거지에 민간 자본이 자율적으로 흘러들 것이라는 기대는 한계가 있다.

  창의도시재생지원센터 같은 중간지원조직의 역할이 여기서 생긴다. 제도를 모르는 주민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합의 과정을 함께 걷고, 공공과 민간 사이의 신뢰를 쌓는 일. 공공이 판을 깔아도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는 구조를 바꾸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다.




□ 참고문헌

 ① 국토교통부, 「2026년도 노후주거지정비 지원사업(뉴:빌리지) 가이드라인」, 2026.2.6.

 ② 건축공간연구원(auri), 「auri brief 302호」, 2025.

 ③ 국토교통부, 「노후저층주거지 정비의 새로운 답을 찾다, 자율주택 2호 준공」, 보도자료, 2019.6.13.

 ④ 대구광역시·LH, 「동인시영아파트 공공참여형 가로주택정비사업 준공 관련 자료」, 2025.

 ⑤ 「빈집 및 소규모주택 정비에 관한 특례법」, 현행.

 ⑥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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